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발렌티니아누스 1세 (문단 편집) === [[원로원]]과의 대립 === [[아우구스투스]]의 제정 수립 이후, 역대 로마황제들은 늘 [[원로원]]과 신경전을 펼치고 대립했다. 이는 원로원에게 평이 좋았던 아우구스투스도 마찬가지였는데, 발렌티니아누스는 원로원과 가장 치열하게 대립했던 황제들 중 한 명으로 유명하다. 원로원과 대립하는 과정에서 과거의 [[티베리우스]], 가이우스(통칭: [[칼리굴라]]), [[하드리아누스]]와 마찬가지로 로마 황제가 활용할 수 있는 두 가지 무기(반역법, 간통법)를 활용했다. 이때 그는 역대 로마황제 중 원로원이 극도로 미워한 [[도미티아누스]]처럼 행동하기도 했다. 따라서 그는 측근 막시미누스를 로마에 파견하여 마술이나 간통 혐의를 빌미로 원로원 계층을 대거 [[숙청]]했으며, 이 과정에서 원로원 의원의 특권이었던 [[고문]] 금지도 무시했다. 당연한 이야기인데, 황제의 측근들이 고위 관직을 장악하고 원로원에까지 진입하게 되니, 원로원의 불만은 컸다. 따라서 그들은 로마의 행정정책을 두고 황제와 사사건건 대립했다. 물론 발렌티니아누스는 [[도미티아누스]]처럼 전적으로 원로원을 배척하고 탄압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런 모습을 생각해보면 티베리우스나 하드리아누스와 더 비슷했고, 칼리굴라처럼 원로원을 온전히 신뢰하지 않은 케이스와 더 비슷했다[* 이미지와 달리 칼리굴라로 잘 알려진 3대 황제 가이우스는 국고를 바닥내지도 않았고, 근친상간도 하지 않은 황제였다. 어떤 의미로는 현대 학자들의 재평가처럼 최소 플라비우스 왕조 시대의 권력강화된 로마 황제 내지 발렌티니아누스 1세와 같은 성향의 군주와 비슷했다. 하지만 그는 정치, 군사 관련 공직도 맡지 않았다가 제위를 물려받은 탓에 경험이 적어, 고삐 풀린 말처럼 원로원과 끝없이 대립하다가 배신한 일부 근위대에게 피살됐다.]. 특히 군사정책이나 종교정책은, 그가 어느 정도 원로원을 의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그러나 황제와 원로원 간의 반목은 상당히 깊었고, 그것은 황제의 이미지가 사후 고대기록 작성자인 원로원 계층에게 상당히 왜곡되는 데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원로원 측이나 도시 지식인들이 기록한 사료에는 황제와 그 측근들을 주로 '폭력적이고 잔인하며 무식하고 탐욕스럽다'고 비판하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과장되었거나 왜곡된 것도 적지 않다. 후대의 유물, 유적 발굴과 금석문 해석 등으로 그 평가가 바뀌고 있는 티베리우스, 칼리굴라, 도미티아누스, 하드리아누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카라칼라, 갈리에누스의 사례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실제 발렌티니아누스는 [[그리스어]]는 잘 하지 못했지만, 고대 기록의 설명처럼 함량미달의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같은 진짜 문맹의 무식하고 잔인한 황제와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그는 모국어 [[라틴어]]는 읽고 쓸 줄 알았으며 그 수준도 고전도 어느 정도 습득했던, 상당히 상식적이고 건강한 교양을 갖춘 황제였다. 이는 그의 인사 정책도 마찬가지인데, 당장 황제가 로마에 파견한 막시미누스는 마르켈리누스의 비판을 엄청나게 받고 있지만, 변호사 경력이 있는 인물로 원로원의 주장처럼 어디서 굴러들어온 못배운 사람이 아니었다. 또 황제가 세금을 철저하게 걷은 측면은 있지만, 국가 유지에 필요한 군비 충당을 위한 목적이 강했으므로 그것을 황제 개인의 탐욕으로 보기는 어려운 일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